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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보존·활용 등 응용학문 융합융·복합 문화유산 특화 인적자원 배출


익산 왕궁리유적

익산 왕궁리유적

  • 왕궁리유적(사적 제408호)
  • 남성벽 실측모습(1977)
  • 발굴조사 모습(1977)

왕궁리 유적은 백제 궁궐터로 유적의 경내에는 백제 왕궁 관련 건물터를 비롯하여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289호), 법당터 등의 사찰 관련 유산이 공존하는 복합유적이다. 왕궁터의 유래와 관련해 ‘백제 무왕도읍설’, ‘별도설’, ‘후백제 견훤도읍설’ 등 다양한 견해가 있으며,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궁성은 남북 492m, 동서 234m, 폭 3m 내외의 장방형 석축 성벽을 두르고, 경사면을 따라 4단의 석축을 쌓아 대지를 평탄하게 다진 후, 대형건물을 포함하여 부속건물과 정원을 조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성곽의 북쪽에는 후원, 서북쪽에는 공방, 화장실 등 다양한 공간을 배치하였다.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首府’명 기와⋅전달린 토기⋅벼루⋅변기형 토기⋅중국제 청자편⋅금제품⋅유리제품 등은 이곳이 왕궁이었음을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다. 한편 대형건물지와 ‘수부’명 기와는 백제시대 수도였던 사비(부여)와 익산에서 확인된 바 있다. 궁성은 전면부에 왕의 업무공간을, 후면부에 후원시설 정원을 조성한 형태로, 중국 북위 궁성인 洛陽城의 궁성배치 방식과 매우 비슷하다.

[삼국사기]에서는 “대관사의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하여 금마군으로 흘렀는데, 그 넓이가 다섯보나 되었다”는 기록에 이어서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 태종무열왕의 죽음을 전하고 있다. 신라왕의 죽음과 연관된 이변이 익산(금마)에서 일어났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이 지역의 중요성을 파악할 수 있다.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 중심부에는 오층석탑이 있다. 1965년에 해체 보수를 거쳐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기단부가 제 모습을 찾았으며 이 과정에서 사리장엄구(국보 제123호)가 발견되었다.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는 석탑에 봉안된 사리장엄의 일괄 유물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유물은 왕궁리 오층석탑의 붕괴를 막기 위해 1965년 탑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탑의 1층 옥개석 윗면에 뚫린 2개의 사리공에서는 ‘유리제사리병’, ‘금제사리내함’, ‘금동제사리외함’, ‘금제금강경판’, ‘금제금강경판내함’. ‘금제금강경판외함’이 발견되었고, 기단부에 뚫린 3개의 사리공에서는 ‘금동여래입상’, ‘청동요령’, ‘유리구슬’이 나왔다. 사리장엄은 구성이나 재질, 조성수법 등이 상당히 공을 들여 만든 공양구이다, 유물의 제작 시기를 통일신라시대로 보는 이도 있으나,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과 제작 기법의 유사성을 비춰볼 때 백제 무왕 대의 제석사지에 봉안된 사리장엄일 가능성이 높다.

  • 동서석축 1 모습
  • 왕궁리 오층석탑(1917)
  • 기단부 심초석 사리공(1965)
  •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국보 제123호)
  • 사리병⋅금제사리내함
  • 사리함 및 금강경판함(1965년 발견 당시 모습)